물론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은 생존 본능과 자기보호 본능이다. 그러나 침팬지로부터 진화되자마자 인간은 사유재산으로 사회적 지위를 결정짓기 시작했다. 약탈자는 부와 지위를 동시에 얻었다. 점차 어떤 방법으로 재산을 얻느냐가 관건으로 떠올랐다. 땀과 노동으로 억척스럽게 재산을 늘린 자는 존경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베블런에 의하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부를 수동적으로 획득한 자야말로 존경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그는 모방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유한계급'은 세상에 태어났다.
도대체 아직도 '고객은 왕' 따위의 구호를 믿는 자가 있을까? 기업들이 굽실거리며 소비자의 취향과 수요에 맞춰 생산공급을 한다고? 갤브레이스는 이런 순진한 사람들의 머리를 딱 때리며 말한다. "기업이 수요에 맞춰 생산한다고? 잠 깨! 기업은 자기네들의 공급에 맞춰 수요를 주무르려 드는거야!"
임대료 통제의 시행 결과 관리소홀과 공급절감으로 인해 도시의 주택사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결국 서민들을 돕기는커녕 도시만 파괴한 셈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경제학 원리를 고려하지 않은 '도덕적' 정책이란 위험한 것이다.
가격, 이윤, 지대, 비용이 경제학의 전부는 아니다. 법, 도덕, 패션, 철학 등도 경제학의 일부다. 베블런과 갤브레이스는 경제학의 정의를 확장시켰다. 동료 경제학자들은 더 넓은 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마셜은 경제학을 너무 쉬운 학문처럼 만들어 우리를 속였다. 신제도학파들은 경제학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마셜의 오구가 얼마나 위력적인가를 보여 주었다. 그들은 한계분석 도구를 온갖 복잡한 사회현상들에 적용시켰다. 브랜다이스는 경제학을 모르는 법조인들은 사회를 위협하게 된다고 말했다. 제도학파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무엇일까? 그들은 경제학이 사회전체만큼이나 크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케인스주의자란 대체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다음의 두 가지를 믿는 사람을 말한다.
- 민간경제가 완전고용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
- 정부지출은 경제를 활성화시켜 불완전고용의 틈을 메울 수 있다.
졸업시험을 통과한 후 케인스는 최초로 경제학 책을 한 권 집어 든다. 마셜의 '경제원론'이었다. 그 책을 읽고 논문을 써 내면 마셜은 여백에다 격려하는 글을 적어 돌려주곤 했다. 고무된 케인스는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어쩌면 난 경제학에 소질이 있는지도 몰라." 케인스의 이 말은 "시간을 때우기 위해" '국부론'을 썼다는 스미스의 말과 더불어 경제학 역사상 가장 겸손한 말로 손꼽힐 만하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경제학자들에게 "직접 보여 주든가, 입을 닥치든가" 하라고 다그친다. "당신들이 정말 돈에 대해 그다지도 잘 안다면 왜 부자가 되지 못하는 거요?"하고 그들은 묻는다. 이 척도에 따라 경제학자들의 서열을 매긴다면 케인스는 리카도와 수위를 다툴 것이다. 창피하지만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꼴찌를 놓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게다.
1930년 출판된 '우리의 자손들에게 주어진 경제적 가능성 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 Children'은 밀을 연상시키는 품위 있는 논문이다. 여기서 케인스는 다음처럼 아름다운 미래를 전망한다.
맬서스는 틀렸다. 칼라일도 틀렸다. 경제학의 최대 숙제라 할 희소성 문제는 100년 이내로 해결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부모세대가 못 이룬 것은 자식세대가 이루어 냈으며, 부모세대의 꿈은 자식세대에겐 현실이었다. 지난 200년간 세계경제가 걸어 온 길은 울퉁불퉁하고 험난한 길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은 줄기차게 상승하는 길이었지 않은가. 우리의 자손 역시 부모의 어깨를 딛고 올라 언젠가는 모든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길이 황금으로 포장될 날도 멀지 않았다. 더욱이 인류의 손발이 고와짐에 따라 인류의 마음씨도 고와질 것이라고 기대해 봄 직하다. 물욕을 충족시키고 나면 친절이나 사랑과 같은 덕목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인간은 영원히 만족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냉장고가 먹을 것으로 꽉 차고 앞마당에 번쩍이는 자동차가 생기면 그 다음 할 일은 무엇인가? 케인스는 이렇게 묻는다. 오늘날 퇴직자들은 지루함을 불평하며 노동을 꿈꾼다. 물욕이 완전히 충족되고 나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퇴직자가 될 게 아닌가? 이들을 지루함에서 구출하려면 얼마나 많은 코미디언들이 필요할까? 배부른 세상은 실존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 차게 될지도 모른다. 인간은 종종 목표의 달성보다 목표의 추구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어쩌면 이러한 의문이야말로 미술품 수집가, 투자가, 후원자, 예술극단 주인이었던 딜레탕트 케인스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뛰어난 경제학 지식으로 인류를 물질적 낙원에 너무 가깝게 데려갈 경우의 지루함에 대비하여 다각적 투자를 해 둔 것은 아닐까. 혹 장기적으로도 살아남을 경우 뭔가 할 일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